재인산성이 말해주는 것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코로나바이러스는 온갖 악재로부터 정권을 구한 신풍
광장 봉쇄 퍼포먼스는 ‘고마운 바람’ 불러내는 초혼굿
‘일상’이 된 코로나를 정권 사람들은 ‘비상’으로 정의
그래야 기본권 중단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
유신시절엔 박정희, 지금은 문재인이 ‘비상상태’ 결정
‘무엇이 두려워 집회를 막는가?’ 보수 일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착각이다. 이런 집회는 정권에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다. 외려 여당 지지율만 올려줄 뿐이다. 광화문을 봉쇄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국민의 대다수는 이 시국에 모여 정치 집회를 여는 것에 반대한다. 그 다수에게 정부가 바이러스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스펙터클을 연출한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작년부터 정권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조국·윤미향·추미애 사태, 오거돈·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라임과 옵티머스 사태. 감찰 무마·선거 개입 등 권력형 비리와 인국공과 부동산 3법 같은 실정. 그런 정권의 지지율을 떠받치는 것은 K방역의 성과다. 저 과잉 대응은 그 빛나는 기억이 국민의 머릿속에서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정권을 살린 신풍(神風)이다. 지난 총선에서 지지율 하락으로 고민하던 그들에게 압승을 안겨준 것도, 야당의 일시적인 지지율 골든 크로스를 뒤집어 버린 것도 코로나바이러스였다. 악재가 끊이지 않는 지금, 그들이 기댈 것 역시 그것뿐이다. 광장 봉쇄 퍼포먼스는 그 고마운 바람을 다시 불러내는 초혼 굿 같은 것이다.
광화문 광장이 텅 빈 사이에 서울대공원들은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차량 시위의 인원을 아홉으로 제한해놓고 이낙연 대표는 봉하마을에서 20여 명의 시민과 어울렸다. 기준이 뭘까? 이 무원칙은 방역이 과학을 떠나 정치로 들어가 버렸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방역의 정치화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 코로나 긴급조치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긴급조치 1호
집회에 반대하는 것과 그것을 금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대중에게 이 둘을 구별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아무리 다수라도 헌법이 보장하는 소수의 권리를 박탈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대중의 분노에 편승한 포퓰리즘 앞에서 이 상식은 간단히 무너진다. 그 결과 헌법 위의 떼법이 어느새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8·15 집회가 대형 감염사태로 이어지자 분노한 대중은 청와대 게시판으로 몰려가 집회를 허용한 판사의 해임 청원을 올렸다. 무려 40만이 동의를 표했다. 이 분노의 파도에 올라타고 정권도 파상공세에 나섰다. 법무장관과 국무총리는 “그 판사”가 “잘못된 집회허가”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원욱 의원은 판사를 ‘판새’라 부르며 그의 이름을 따서 ‘박형순 금지법’을 발의했다.
사법부가 무차별 공격을 받아도 대법원장은 말이 없다. 그저 판사들에게 “근거 없는 비난이나 공격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으로 재판에 집중”하라고 당부할 뿐이다. 심지어 “열린 마음으로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시대의 흐름을 읽어나가”라며 이 빌어먹을 시류에 편승하는 듯한 발언까지 했다. 판사들마저 대중과 정치인 포퓰리즘 연합의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정치 무기가 된 방역
법무부에서는 드라이브 스루 시위마저 금지했다. 사유가 가관이다. ‘밀폐된 차내에서의 코로나19 전파 우려. 자동차의 물체적 특성상 그 자체로 위험성을 내포.’ 자동차의 디자인 속성과 물체적 특성이 집회를 금지할 사유가 된다. 차라리 차량운행 자체를 금하든지. ‘돌진 등 불법행위 발생 시 단속의 어려움.’ 앞의 두 차례 차량시위에서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우려의 근거가 뭘까?
다행히 법원에서 차량시위는 허용했다. 하지만 차량의 수를 9대로 제한하고 창문도 못 열게 하는 등 무리한 조건을 여럿 달았다. 그 또한 방역의 필요를 크게 넘어선다.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 게 아니다. 그저 형식적 보장으로 면피를 한 것뿐이다. 주눅이 든 법원은 벌써 헌법이 아닌 떼법의 정신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법학자는 봉쇄된 광장과 9대의 차량시위를 보며 감격한다. “코로나 위기라는 비상상황에서도 집회시위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국, 정말 민주국가다.” 법무장관을 지냈던 이분이 정말 법학을 전공한 게 맞는지 요즘은 가끔 의심한다. 그의 말이 맞다면 그 시위를 원천봉쇄하려 한 문 정권은 반(反)민주세력임에 틀림없다.
보다 못한 사회시민단체에서 우려의 성명을 냈다. 정부의 조치가 유엔 산하기관에서 발표한 ‘코로나 시기의 집회결사의 자유에 관한 10대 원칙’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는 ‘공중 보건 비상사태가…일반적인 권리나 평화로운 집회와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억압하는 구실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코로나는 일상인가 비상인가
왜 무리수를 두는 걸까? 여전히 K방역의 국뽕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들하지만 철저한 추적·차단·격리 시스템은 한때 전 세계의 감탄을 샀다. 코로나를 곧 종식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무너졌다. 그렇다면 코로나와 안전하게 동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하나, 정권의 마인드는 여전히 초기의 성공모델에 고착돼 있다.
독일의 경우 과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감염 위험을 최소화하는 집회나 공연의 방식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문 정권은 그 과제를 여전히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 잘난 K방역이 서구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거기에 집회와 시위의 자유의 원천적 금지까지 더해졌다.
조국 전 장관의 말에서 ‘비상상황’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논란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코로나는 일상(日常)인가? 아니면 그의 말대로 비상(非常)인가? 코로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미 일상이 됐다. 하지만 이 정권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국면을 ‘위기’나 ‘비상상황’으로 정의하려 한다. 왜? 그래야 국민의 기본권을 중단하는 조치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사실 차벽 자체가 위헌은 아니다. 헌재에서는 그것을 ‘급박하고 명백하며 중대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 규정했다. 차벽의 옹호자들은 지금이 그 마지막 수단을 써야 할 위기상황이라 본다. 반면 반대자들은 코로나는 이미 일상이 되었다고 반박한다. 백신이 나올 때까지 몇 년이고 비상사태로 지낼 수는 없잖은가.
지금이 비상이라고 말하는 자
일상이 비상으로 규정되면 비상은 일상이 된다. 지난 8월 이원욱 의원은 국가재난 사태나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가 내려질 경우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집회나 시위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안을 발의했다. 집회와 시위의 일상적 자유가 따로 법원의 허락을 구해야 할 예외적 상황이 된 것이다. 그새 새로운 바이러스가 찾아오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문제는 지금이 비상인지 아닌지는 누가 결정하느냐는 것이다. 유신 시절엔 박정희가 그것을 결정했다. 지금은 그 판단을 문재인 대통령이 내린다. 지금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해야 할 비상상황이라고 결정한 것은 그였다. 이로써 이 나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비상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 주권은 그에게 있다.”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의 말이다.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거기에 한마디만 덧붙이면 유신헌법이 된다.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박정희 독재는 국민투표로 확인되는 다수의 힘으로 유지됐다.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과거의 국민투표가 지금은 여론조사로 대체됐을 뿐이다. 그래서 차벽은 방역을 넘어 헌법의 문제인 것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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